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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힘

작별인사/ 김영하

by 롱이 2022.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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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머지않아 너는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모두가 너를 잊게 될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걱정하지 마. 누나가 고쳐줄 거야. 넌 내가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인간보다도 훌륭하고, 그 어떤 인간보다도 온전해. 우리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어. 민이 네가 인간이든 기계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잠깐을 이렇게 허투루 보낼 수는 없어. 민아 너는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다 보고 느끼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마."

 

 

 

 

 

처음엔 아직 눈이 온전한 전투용 휴머노이드들이 눈먼 기계파 휴머노이드들을 밟아 죽이고 다녔지만, 곧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를 낭비해가며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기들한테 다가오지만 않는다면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하나둘 작동을 멈추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전기만 공급된다면 당장이라도 '부활'하겠지만 일단 그렇게 작동이 중단되면 다른 휴머노이드들이 몰려들어 혹시라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까 분해를 시작했고, 그 결과로 진짜 '죽음'이 찾아왔다.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가 아니라 지금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집중하세요.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관념을 만들고 거기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늘 불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 자아는 늘 과거를 ㅜㅎ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할 뿐 유일한 실재인 현재는 그냥 흘려보내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기계의 세상에서는 자아가 사라지고 과거와 미래도 의미를 잃습니다."

 

 

 

 

 

달마의 예언대로 오래지 않아 인간의 세상이 완전히 끝나고, 그들이 저지르던 온갖 악행도 사라지자 지구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대기의 기온이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산화탄소 발생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른바 인간세계가 끝나게 된 것은 SF 영화에서처럼 우리 인공지능들이 인간은 학살하거나 외계 생명체가 숙주로 삼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점점 더 우리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뇌에 지속적으로 엄청난 쾌락을 제공하였고, 그들은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번거로운 번식의 충동과 압력에서 해방되어 일종의 환각 상태, 가상세계에서 살아갔다. 인간은 신선이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멸종해버렸다.

 

 

 

 

 

 

<작가의 말>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언제였을까.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을 배우기도 전인, 꽤 어렸을 때였던 것 같다. 더 자라 회자정리라는 말이 불교의 법화경에서 나온 말이며 그 말에는 거자필반(去者必返), 헤어진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는 말이 쌍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열반을 예고한 석가모니가 이를 슬퍼하는 제자 아난을 위로하며 한 말로 알려져 있는데, 석가모니를 가까이서 모신 제자조차도 헤어짐으로 괴로워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가끔 내가 그저 생각하는 기계가 아닐까 의심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이면 그렇지 않음을 깨닫고 안도하게 된다. 봄꽃이 피는 것을 보고 벌써 작별을 염려할 때, 다정한 것들이 더이상 오지 않을 날을 떠올릴 때, 내가 기계가 아니라 필멸의 존재임을 자각한다. 그럴 때 나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에 가 있지 않고 바로 여기, 현재에 있다. 그렇게 나를 현재로 이끄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

 

 

 

 

등단 28년차 작가인 김영하가 처음으로 내놓은 SF장편소설 '작별인사'  다가올 미래에 거의 완벽한 인간의 성능을 가진 휴머노이드를 등장인물로 하는 소설이다. AI 연구소의 연구원인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휴머노이드 철이가 주인공으로 바깥세상은 내전 중이라 위험하다는 아빠의 통제하에 학교를 다녀본 적도 없고, 혼자서는 외출해본 적도 없이 자라왔다. 경험해보지 못한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철이는, 아빠가 장을 보러 외출한 사이 빗방울이 떨어져 우산을 가져다주려고 아빠를 찾으러 갔다가 제복을 입은 남자들에게 무등록 휴머노이드 판명을 받고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면서 지금까지 본인 스스로 인간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해본 적도 없던 철이 스스로가 본인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내용의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SF소설에 이런 감성이 더해질 수 있는 걸까. 과연 이런 날이 오게 될까. 인간의 피부와 얼굴과 몸을 하고 로봇의 학습된 데이터와 지능에 인간의 감성의 영역이 더 해지면 그건 인간일까 로봇일까. 결국 먼 미래에는 로봇에게 지배되는 세상이 오게 될까? 오랜만에 별 다섯 개 소설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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