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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힘

여름과 루비/ 박연준 장편소설

by 롱이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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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루비/ 박연준 장편소설

 

 

 

 

오래 잊고 있던 나의 비밀 친구를 떠올렸다. 나의 비밀 친구는 어린 시절에만 존재했고, 상상속에서만 존재했다. 그래서 만나본 적은 없다. 그래도 그 친구를 오래 그리워했다. 언젠가부터 내게 그런 친구가 있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살아왔는데, 그리워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어버렸는데,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그 친구가 몸을 얻어 내 앞에 환생해 있었다. 박연준은 단지 처음들을 기억해내고 재현하지 않는다. 처음을 하나하나 낱낱이 되살려놓는, 그녀만의 소생술이다. 박연준의 소설은 너무나도 살아 있다. 읽는 내내 오감이 곤두서 몸이 열리고 이야기들이 내 실핏줄을 타고 흘러다녔다. 아주 비밀스럽고 친밀한 교류를 한 것처럼. 임솔아(소설가)

 

 

 

 

 

새 엄마와 나는 친해지지 못했다. 우리는 고작 열여섯 살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자주 싸웠고, 서로 미더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비슷한 불만을 품었다. 나는 '새' 엄마가 싫었고, 그녀는 '헌' 자식이 싫었다.

 

 

 

 

 

우리는 하고 많은 자리 중 늘 같은 층위에 앉았다. 갈 방이 많은데도 같은 방에 들어와 뒤척이는 생쥐들처럼 굴었다. 곁에 붙어 앉아 서로 좁다고 생각했다. 몸이 닿으면 얼른 떨어지지만 아예 멀리 갈 수는 없다고 믿었다. 서로의 존재가 불편했지만 피하는 법을 몰랐다. 우리에겐 아빠라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더하거나 빼기가 쉬웠다. 통분이 필요 없는 관계랄까. 더하기 빼기를 결정하는 건 언제나 아빠였는데, 내 생각에 아빠의 몸은 새엄마에게 더해지고 마음은 주로 내게 더해졌던 것 같다. 나는 아빠에게 늘 까다롭고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궁리했기 때문에 마음 쓰이게 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누군가의 마음이 쓰이도록 행동할 줄 아는 것, 그런 건 타고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유년이 시절이라는 것. 유년은 '시절'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 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놓는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붉음과 빛남을 흉내 낸 인조보석처럼. 박혀 있다. 어른의 행동? 그건 유년의 그림자, 유년의 오장육부에 지나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진 '누군가의 시작'을 본 게 처음이었다. 사람이 태어나 사는 일을 시작할 때 처음 지니게 되는 것. 그런 걸 보았으므로 나는 학자에게 반했다. 작은 눈, 코, 입 연해서 주름진 살결들, 관절이 구분되지 않는 팔다리. 둔덕 모양의 도톰한 배. 작은 종처럼 달랑이는 고추. 이 모든 게 어떻게 시작하는지 보았으므로 학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겁이 많은 사람이 대부분 나쁜 건 아니지만 나쁜 사람들은 대부분 겁이 많다. 그들의 나쁨을 파헤져보면, 그러니까 그 끝의 끝까지 추적해보면 결국 겁이 나타난다. 돈 때문에 나빠진 사람은 가난을 겁내고, 사랑 때문에 나빠진 사람은 이별을 겁내고, 권력을 손에 쥐고 나빠진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걸 겁낸다. 그리고 누군가를 미워하다 나빠진 사람은 누군가에게 자신도 미움을 당할까 봐 겁낸다.

 

 

 

 

 

과거를 생각하면 슬프고 현재를 떠올리면 입을 다물고 싶고, 미래를 생각하면 씩씩해져야 할 것 같다. 모든 것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낯설지않은 문체와 작가 이름 박연준. 몇 년 전 읽었던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의 저자였다. 가볍고 빠르게 읽히는 책으로 단시간에 집중해서 읽을 소설책을 찾고 있다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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