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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힘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

by 롱이 202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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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 포털 사이트에 에밀 아자르를 검색하면 놀랍게도 로맹 가리라는 다른 이름의 인물이 나온다.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의 여러 필명 중 하나로, 로맹 가리는 [유럽의 교육] [하늘의 뿌리]로 프랑스 문학계의 스타가 되었으나 이후 발표한 작품들마다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아 심적 고통을 많이 받아 이후 포스코 시니발디, 샤탕 보가트 등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했다. 1980년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겨 66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두 번째 소설 [자기 앞의 생] 으로 공쿠르 상을 수상했는데 이미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받은 로맹 가리는 공쿠르상을 두 번 받을 수 없는 원칙을 깨고, 두 번 수상한 유일한 작가가 되었다. 책 마지막 부분에는 로맹 가리가 유서처럼 남긴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 에서는 죽기 다섯 달 전 친구에게 "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 나이라 무명이었을 뿐이네" 말했다는 부분이 있는데 여러 필명을 돌려가면서 집필해야만 했던 작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작가의 불안하고도 어두운 그 속에서도 작은 꽃이 피어있는 것 같은 정서가 그대로 담겨 있는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불안하고 위태롭지만 서로의 관계 안에서는 따뜻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오랜만에 씁쓸하고도 아름다운 책을 만났다.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야피, 라우드 알 라야힌



 


쉬페르가 감정적으로 내게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자, 나는 녀석에게 멋진 삶을 선물해주고 싶어졌다. 가능하다면 나 자신이 살고싶었던 그런 삶을. 하루는 어떤 부인이 쉬페르를 보더니, "아이구, 그 개 참 예쁘기도 해라!"라며, 개가 내 것인지, 그리고 자기에게 팔 의향이 없는지 물었다. 처음에는 그 마음씨 좋아 보이는 부인이 정말 돈 많은 집 부인인지 확인해보려고 오백 프랑을 불렀다. 내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그녀에겐 운전기사가 딸린 차까지 있었다. 그녀는 내 부모가 나타나 소란이라도 피울까봐 그러는지 쉬페르를 얼른 차에 태우고 가버렸다. 내가 이 말을 하면 안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오백 프랑을 접어서 하수구에 처 넣어버렸다. 그러고는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송아지처럼 울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다. 돈 한푼 없는 늙고 병든 아줌마와 함께 사는 우리는 언제 빈민구제소로 끌려가게 될지 모르는 처지였다. 그러니 개에게도 안전하지 못했다.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유태인 학살 전인 열다섯 살 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이튿날 기분 좋게 잠이 깼다. 잠에서 깨어날 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날은 기분이 좋은 날이다.





그녀는 이제 숨을 쉬지 않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숨을 쉬지 않아도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나는 그녀 곁에 펴놓은 매트에 내 우산 아르튀르와 함께 누웠다. 그리고 아주 죽어버리도록 더 아프려고 애썼다.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계속 그녀가 그리울 것이다. 라몽 의사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튀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필요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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