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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힘

콜센터의 말/ 이예은 [9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

by 롱이 2022.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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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의 말/ 이예은 [9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

 

 

 

9회 카카오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한 이예은 작가의 에세이. 초보 상담원으로서 겪은 고충과 콜센터를 덮친 코로나 19로 인한 혼란뿐만 아니라 콜센터에서 사용하는 매뉴얼화된 존경어와 겸양어가 실망과 기대, 안도와 우울 같은 생생한 감정들과 대비되며 만들어 내는 묘한 울림이 특히 감동적이다.

 

2015년 한국에서의 호텔 홍보 일을 그만두고 일본에 살기 시작한 저자는 2020년 1월, 일본 여행사의 콜센터에 입사한다. 한국어를 일본어로, 일본어를 영어로 한국어로 옮기던 이력을 바탕으로 상담원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방인의 세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콜센터의 말들을 들여다본다.

 

그의 시선 아래 '유감이지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과드립니다'라는 말들은 색다른 질감과 온도로 떠오르며 새로운 의미를 덧입는다. '잘 부탁드립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협력해 주세요' 같은 표현들은 콜센터 바깥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며 힘을 주는 말들이다. 저자가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 적응하면서 만났던 위로와 환대의 말들이기도 하다. 너무 익숙해져 지나쳐 버린 말들을 곱씹는 23편의 글을 일곡 나면 독자들은 평범하지만 반짝이는 말들을 새로 얻게 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인 민음사tv. 월간책추천, 문화생활비 언박싱, 갓생살기, 책처방, 최근 시작한 세문전 월드컵까지 민음사 유튜브 채널에서는 컨텐츠가 다양하고 빵빵하다. 여기서는 무조건 민음사 책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출판사의 좋은 책들도 소개해주는 착한 채널이다. 요즘 책을 고를 때는 대부분 민음사 유튜브를 참고해서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들을 메모해뒀다가 읽는 거 같다. 책 추천을 받아서 읽어보기도 하고, 직원들끼리 하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다양한 단어들로 표현이 풍부해져서 그런가? 불 필요한 말들을 듣고 쏟아 내는 요즘.. 민음사 유튜브를 보면 진정한 말을 듣는 거 같달까; 역시 다독하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라 그런 걸까 생각하게 된다. 이번 민음사 유튜브 갓생살기에서 소개된 '콜센터의 말' 이라는 책을 접하고 오랜만에 읽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나도 첫 직장에서 7여년 넘게 생활하면서 업무 특성상 콜센터를 꼭 거쳐야만 했었기 때문에 반년 이상 콜센터 부서에서 고객 상담을 했던 적이 있었다. 업무 특성상 대면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었다. 콜센터 업무가 나와는 안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닌데 일하는 동안은 전화 벨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려서 어느 순간부터는 벨소리조차 듣기 싫어지고 업무 외에 사적인 지인들과의 통화들 마저 힘들었던 잊고 있었던 기억들도 다시 생각났다. 콜센터의 말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콜센터 업무 당시의 나의 주변 환경들, 전화를 통해 고객상담을 했을 때 좋았던 일들과 속상했던 일들이 생각나면서 이 책에서 많이 공감하고 위로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정신적인 노동이 많이 소모되는 직업임이 분명함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특히나 좋았던 문장들을 기록해놔야지.

 

 

 

 

 

1. 언어는 사진과 비슷하다. 특별한 풍경을 만나면 우리는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어떻게든 붙든다. 사진은 지나간 추억과 함께 현재의 나를 잇는 매개채다. 그렇지만 그 순간 내 시선에 닿은 풍경과 기계가 내놓은 결과물은 같지 않다. 더군다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 장면을 되돌아보면 사진으로 남긴 순간만 생생하고, 프레임 바깥의 다채로웠던 경험은 휘발되고 만다. 완벽하지 않은 기록에 기억이 갇히는 셈이다.

 

 

2. 개개인이 축척한 단어집에는 언제나 편차가 있다. 단어별 정의도 그 사람의 성향이나 경험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니 상대방이 받아들인 내 말의 의미가 내가 보낸 것과 같은 색과 모양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우리의 언어가 조금은 비슷하기를 바라며 나의 말을 흘려보낼 뿐이다. 나의 사랑과 너의 사랑이 같지 않음에도 별 수 없이 '사랑해.'라는 말을 주고받고 안도하듯이

 

 

3. 고작 몇 분짜리 대화로 그들의 삶 전체를 재단할 수는 없다. 그래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라는 인사를 비아냥으로 받아치는 사람과 "상담원도 힘들겠네요."라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의 삶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코로나발 취소 대란 속에서 나는 얼굴 모를 이들의 민낯을 조금씩 훔쳐본 기분이었다.

 

 

4. 콜센터 생활을 하며 심장이 굳고 피가 식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이 두 개의 기억을 치료제처럼 곱씹었다. 고객에게는 별일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게 나눠 준 따뜻한 한마디와 그 말을 전달하기 위해 기꺼이 내준 몇 초 혹은 몇 분위 시간의 선의를 베푸는 데는 대단한 수고가 들지 않는다. 무심코 건넨 배려 섞인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단비와 같은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있어 누군가는 그날 하루, 혹은 더 긴 시간을 너끈히 버티기도 한다.

 

 

5. 콜센터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정해진 대본에 따라 누구보다 상냥하고 이해심 깊은 상담원을 연기해야 했다. 해드셋을 쓰고 있는 나는 본래의 내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평소에는 타인의 일에 쉽게 간섭하지 않는 본래의 내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평소에는 타인의 일에 쉽게 간섭하지 않는 내가 고객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며 하나라도 더 도울 일이 없는지 물어봐야 했다. 30여 년간 인간관계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이제는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않게 되었지만, 고객의 전화는 먼저 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도 침착하고 상냥한 말씨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니 어떻게 피곤하고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

 

 

 

 

전화상의 언어든 마주보고 대화하면서의 언어든, 같은 표현도 부드러운 말들로 상대를 따뜻하게 위로해줄 수도 있고 마음 후벼 팔 수도 있다. 인간의 성숙도는 결국 그가 하는 말에서 가장 잘 표현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모두 다 성숙한 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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